경북 가볼만한 곳 불국사, 병산서원
안녕하세요. 오늘은 경북 가볼 만한 곳, 경상북도 여행지에 대해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2곳인 불국사와 병산서원입니다.
불국사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385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신라 연간을 기원으로 하는 사찰. 1995년 12월에 토함산 중턱의 암자 석굴암과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참고.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불국정토를 속세에 건설하겠다는 야심 찬통 일 신라의 꿈을 드러내는 건축물로, 이름인 불국사는 불국정토에서 유래한 호국 사찰이다. 석굴암도 마찬가지. 황룡사가 거대한 규모로 유명한 절이라면, 불국사는 치밀한 구성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절이다. 다만 불국사도 전성기인 신라~고려시대에는 지금의 8배에 달하는 규모의 대사찰이었으며, 세월을 거치면서 파괴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규모가 줄어든 것이다. 오늘날의 불국사는 조선 영조 때 복원된 불국사에 기인한다.
대표적인 한국 건축물 중 하나로 경주시로 소풍 내지 수학여행을 간다면 꼭 들르는 곳. 인근 경상도 출신들은 수학여행으로 불국사를 가지는 않지만, 유치원부터 시작해 고등학교까지 소풍 단골 장소이다. 즉, 경상도 사람들은 대부분 불국사를 가봤다는 것이다.
입장료는 2021년 성인 기준 6천 원. 카드 결제도 가능하다.
정확한 건축 연대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불국사 고금 창기'[4]라는 기록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15년(528)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 부인(연제 부인)이 새 사찰을 짓기를 소원하여 불국사를 처음 지었다. 이후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 부인이 크게 개창했는데, 이때 아미타 여래상과 비로자나불을 조성해 봉안했다.
문무왕 10년(670)에는 무설전을 건설해 화엄경을 강의했고, 경덕왕 10년(751)에 그 유명한 김대성이 크게 중수하면서 청운교, 백운교, 석가탑, 다보탑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 '불국사 고금 창기'의 기록이다. 출판사 지학사에서 만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연표에도 751년이 불국사와 석굴암이 중창되기 시작한 해라고 서술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앞부분이 빠지고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나온다.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모시기 위해 석불사(석굴암)를 만들었고 현생의 부모를 모시기 위해 불국사를 창건했다는 것. 이 일화가 유명해서 김대성이 지은 줄 아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불국사 고금 창기(佛國寺古今創記)의 기록이 더 정확할 거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불국사 자체가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기에 김대성 혼자서 그런 엄청난 건설을 했다기보다는 [5] 법흥왕 때부터 신라 국가차원에서 개증축을 해오다가 훗날의 모습의 바탕이 되는 결정적인 중수를 김대성이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아무래도 불국사 고금 창기의 기록이 더 세세하기도 하고, 삼국유사가 설화적인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6][7] 참고로 삼국사기엔 김대성이라는 이름은 없고 경덕왕 시절 중시를 지낸 김대정(金大正)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기백 교수를 비롯한 여러 역사학자들은 정황상 동일인물로 추정한다. [8] 어쨌든 중수와 관련한 유명한 설화로 삼국유사에도 실린 김대성 설화가 유명하다. 김대성이 재상급인 중시로 알려진 것으로 보아 고위 귀족이 심혈을 기울여 중수하면서 규모가 상당히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김대성이 중수한 연대는 751년에서 765년 사이로 추정된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 중수하였고 여러 부분에서 통일신라의 정형화된 양식이 보이기 때문에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는다. 이때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 다보탑 등이 세워졌으며 2 탑 1 금당의 가람 (절의 배치된 모양) 형식이 완성되었다. 불국사 고금 창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의 불국사는 건물만 80종·2,000여 칸으로, 오늘날 불국사의 8배 규모의 대사찰이었다.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기 어려우나,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 말 기록인 동경 유록, 간재 집에 의하면 여전히 신라 때의 석탑, 불상, 그림들이 남아 있었고 천 칸의 큰 규모였다고 한다. 동경 유록에서는 신라왕이 백성의 힘을 이런 쓸모없는 곳에 쏟아부었으니 애석하다고 기록하였다. 숭유억불에 따라 불교를 천시하던 조선시대 유학자의 기록임을 감안할 필요는 있지만, 왜란 전 불국사의 규모가 상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면서 가토 기요마사의 방화로 한 번 크게 불타 사라졌다. 지금도 대웅전의 장대석 등을 살펴보면 화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불국사 가이드 투어의 설명에 따르면 해당 방화는 처음부터 절을 파괴할 목적으로 방화한 것이 아니라, 당시 경주 일대를 점령한 일본군 병사들이 굉장한 절이 있다고 구경 왔다가 의병이나 승병을 무장시키기 위해 절에 보관 중이던 대량의 무기를 발견하고 본대에 연락해서 공격한 것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맹독을 감추고 있다"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가토 기요마사는 불교 신자였다. 다만 가토 기요마사는 정확하게는 가마쿠라 시대에 승려 니치렌이 창시한, 법화경만을 유일무이한 경전으로 떠받들고 다른 경전은 깡그리 무시하고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련정종의 신자였다. 일련종은 일본의 기존 교단들에게도 이단이라면서 심한 적대를 받았고 일련종 자신 또한 같은 불교라도 법화경 외의 다른 경전을 사용하는 교단은 배척하는 극단적인 종단이었기에 역시 법화경 외의 다른 경전도 인정하던 한국 불교에는 자비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국시대 당시 일본에서는 워낙 승병들의 활약(?)이 많았던지라 이미 승병에 학을 뗀 상태였는데 승병을 무장시킬 무기도 발견됐겠다, 명분은 충분하다.
조선 영조 41년(1765)에 불국사 대웅전이 다시 세워지고, 1779년 경주 지방 유림이 지원하여 중창하는 등 (기사 링크) 재건하는 노력이 있었으나 결국 조선 말기를 거치면서 사실상 폐허가 되었으며, 당시 다 쓰러져가는 불국사를 조선 말기에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다. 사실 국교가 유교였고 유학자들이 불교라면 덮어놓고 혐오하던 조선시대에는 멀쩡한 절도 트집을 잡아서 부수고 승려들은 부역에 끌고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건드리지 않은 절은 왕실 원찰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왕이 불교에 너무 열중한다 싶으면 득달같이 신하들의 상소가 쏟아졌던 때이다. 그런 시대에 엄청난 돈을 들여서 일개 지방의 사찰을 복원하자고 했으면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테니, 사실상 터만 남았던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1918년부터 1925년까지 대웅전과 다보탑을 보수하였다. 그러나 다보탑의 석물과 사리함 등이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그동안에도 여러 건물이 소실되었다. 원래 일제는 불국사 유적을 축소하여 건성으로 복원하려고 하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계획을 수정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복원계획 수정 이는 불국사의 여러 유적들을 보수공사를 핑계로 약탈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로전 앞에 석등 모양으로 된 사리탑(舍利塔: 보물 61호)은 한때 일본인이 빼돌렸으나 1934년 반환되어 제자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일제가 임시로 복원한 상태로 있다가 [9] 결국 광복 후 1970년대에 와서야 대규모 복원이 이루어졌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그 당시 돈으로 약 8억 원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제대로 복원되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하며, 석축과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이나 대웅전은 조선시대의 건물이며, 구품 연지가 재건 당시엔 동선을 막는단 이유로 메워버렸고, 복원된 목조 건물도 고려 중기에서 조선시대의 양식을 뒤섞어서 재현한 것이기에 창건 당시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출처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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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진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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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 위치한 서원이다. 류성룡과 관계가 있는 서원이며, 도산서원과 함께 안동을 대표하는 서원이다. 근래에는 만대루를 비롯한 건축물과 주변 풍경의 아름다움으로 이름이 높다. 특히 '병산'이라는 이름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비 온 뒤의 안개와 고즈넉한 분위기가 절경이다.
1978년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옥산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중복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2010년 7월 31일에 하회마을의 일원으로 먼저 등재되었으며 201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서원 중 하나로도 등재되어 세계유산 2관왕이 되었다.
고려 시대의 사림의 교육 기관인 풍산현의 풍악 서당(豊岳書堂)을 선조 5년(1572년)에 류성룡이 안동으로 옮겨왔고, 이후 1614년에 병산 서당으로 개칭되었다. 철종 14년(1863년)에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고종 5년(1868년)에 벌어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가치 있는 47개 서원으로 지정되어 훼철(毁撤)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지면서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에 각각 다시 지어졌다.
대한민국의 서원 중에서 유일하게 아직 명맥을 이어 나가는 서원이다. 후학들이 돈을 모아 비교적 교통이 편한 안동시 풍산읍에 풍산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출처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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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풍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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